역사적 필연성은 전 지구화globalization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전 지구화는 그 자체로 텔로스 쪽으로 방향이 맞춰진 시간이었다. 텔로스는 더는 혁명이 아니었다. 전 지구적 자유 시장의 승리가 텔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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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르크스의) 대서사는 그것이 파괴하기로 되어 있던 질서(자본주의)의 경영자들에게 인수되어 재활용됐다. 이전엔 체계의 부정의를 비판했지만 이제는 그와 못지않게 체계의 희생자들, 그저 번갈아 일어나는 사태의 시간 속에 머무는 거주자들의 무지도 비난한다. 비판적 담론은 희생자들이, 자유 시장의 자유(소비지상주의적 나르시시즘의 가치 등)를 내면화하는 수동적 형태 혹은 반권위적이고 자유지상주의적인 가치를 홍보하는 능동적 주장의 형태로든 자유시장의 시간에 너무 잘 적응하여 자유 시장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다고 질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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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신주의 소비지상주의 스펙터클 비판은 과거에는 자본주의 기계의 오작동을 보여주는 것과 관련됐지만 이제는 이른바 ‘민주적 개인들’을 타깃으로 삼고 체계의 재생산을 그 민주적 개인들 탓으로 돌린다.
자크 랑시에르, 모던 타임즈
체제가 아닌 개인을 비판하기. 셀카, 인스타그램등 SNS 사용, 소비로 표현되는 자아 등 현대 예술 작품에서 종종 목격되는 현상이다. 자유 시장 경제 체제의 희생자-개인-들이 자유 시장 경제를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착각하게 한다. 하지만 이는 개인(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들 보다는 거대 기업, 정부 정책, 유통 등의 시스템 문제이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한국의 폐기물 재활용률은 세계 2위이다(참고기사). 문제는 포장용 플라스틱의 사용량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개인에게 점점 더 큰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죄책감을 이용해 더 큰 문제를 보지 못하도록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패스트 패션(fast fashion. zara, forever 21등 짧은 주기로 생산, 판매되는 브랜드)과 유통업과 맞물린 대기업 상품 소비에서 과연 개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를 피할 수 있는가? 단순히 자라에서 옷을 사지 않으면 되는 문제인가? 길거리에서 파는 일명 보세 옷은 환경 파괴와 노동자 착취 문제에서 안전할까? 대형 마트 대 전통시장은 어떤가. 일정한 품질과 가격, 다양한 선택지, ‘합리적’ 개인이라면 대형 마트를 선택할 것이다.
SNS 사용도 마찬가지이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사용등을 개인적으로 안 할 수는 있어도, 이를 모든 개인이 피해갈 수는 없다. 디자이너, 예술가 역시 인스타그램을 포트폴리오로 활용한다. 최근 인스타그램은 해당 프로그램 안에서 제품판매가 가능하도록 업데이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페이스북은 이미 광고와 마케팅의 성지가 되었다. 이 모든것을 부정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자급자족 하는 삶을 현대 개인에게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보다 어리석은 요구가 있을까.
이렇듯 기득권과 국가는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개인의 몫으로 돌림으로써 그가 말하듯 ‘전 지구적 자유 시장의 승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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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또한 ‘여성 개인에 대한 비판’이라는 손쉬운 해결책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위에 인용한 랑시에르의 문장을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단어만 바꿔보자면
‘이런 비판적 담론은 여성 혐오의 희생자들이, 가부장제를 내면화하는 수동적 형태 혹은 반권위적이고 자유로운 가부장제의 가치를 홍보하는 능동적 주장의 형태로든 여성 혐오적 체제에 너무 잘 적응하여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고 있다고 질책한다.’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체제에 적응하고 그러므로 동시에 희생당한 개인에게 가부장제 권력(남성 권력)을 일절 차단하고 페미니즘적으로 완벽한 진공적 상태로 살아가라는 것은 앞서 말한 현대인에게 자연으로 돌아가 자급자족 하라는 것과 같이 허황된 요구일 것이다(이것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개인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개인에 대한 비판이 가해질 수록 개인의 부채감과 죄책감 위로 거대 이데올로기, 국가, 체계 등은 잊혀지고 이는 가부장제의 끝나지 않는 승리를 돕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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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지배권력에 대한 비판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책에서 지배 권력은 권력에 대한 비판을 수용함으로써 끊임없이 재생산된다(이 재생산은 수전 팔루디가 말한 백래쉬-책에서는 반격으로 번역되었다-와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끊임없는 쳇바퀴에서 빠져나오려면 우리의 시점을 수평적 진보/쇠락에서 수직적 시간 분배로 이동해야한다고 한다. 그리고 공간과 시간의 분배 안에 구현되는 정의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길 촉구한다.
과거 사건과 미래 사건 사이에 뻗은 하나의 선이기 이전에 하나의 환경이요 하나의 삶의 형태이다.
(…) 이 요점에 입각해 시간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시간을 "교육적 정상시간이 아닌 해방의 시간으로 삶의 시간을 분배해야한다. 전지구적 시간 진행 과정에 맡겨진 시간 정의가 아니라 시간의 내적 재분할로서, 간극—무지와 뒤늦음의 현시가 아니라 시간성을 나누는 정상 논리에서 이탈한 실정적 단절—의 생산으로서 작동하는 시간의 정의에 대해서 말이다"
위 책, 32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