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바디우에 의하면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진리의 무력함이다.
모든 진리는 어떤 역량임과 동시에 어떤 무력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전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와 전체성의 양립 불가함은 현대의 결정적인—또는 헤겔 이후적인— 가르침일 것이다.
하나의 진리는 자신의 독특함이라는 바위에 부딪히며, 바로 여기에서만 하나의 진리가 무력함으로서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장애물을 명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는 어떤 진리가 그것에 대해서 이름 붙이기를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에 포함되는지 진리 자신도 미리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철학은 진리를 생산할 수 없으며 진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오로지 예술, 즉 '사유할 수 없는 사유'인 시라 말한다. 심지어 그 때문에 철학이 자신의 영역에서 직접적인 사유인 시를 추방했다고 주장한다. (비미학 2장, 시란 무엇이며, 철학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 이 부분은 너무 재밌기 때문에 직접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에 따라 그가 생각하는 사유할 수 없는 사유, 진리로서의 시의 무력함은 아래와 같다.
언어의 역량을 드러내는 시는 그 역량을 명명하는 데는 무력하다.
수학소 고유의 명명할 수 없는 것은 언어의 무모순성이지만, 시 고유의 명명할 수 없는 것은 시의 역량이다.
⊹ 진리로서의 시가 아니라, '다른 진리와 차별되는' 시의 독특함은 뭘까?
나의 의문은 이것이다. 모든 진리가 존재 자체의 한계점 앞에서 무력해진다면, 모든 진리의 무력한 지점, 역량은 존재 자체인가? 각 진리 사이의 차이점은 없는가? 자기 자신을 호명하지 못하는 타인 없는 주체로만 존재한다는 점 이외에, 다른 차별점은 없을까?
바디우는 수학에서 무모순성이라는 존재적 특징이 수학의 독특함을 나타내는 반면 시는 언어적 무한함을 명명할 수 없음을 독특성으로 꼽았다. 그러나 이는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이다. 시각 예술 역시 시각 언어의 역량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을 명명할 수 없다. 시각 요소가 시각 예술의 특징이 아닌 그 존재 자체이기 때문이다.
‘언어’적 무한성이란 시의 특징이 아닌 실체다. 음 혹은 박자 없이 음악이 될 수 없듯이 언어 없이 시가 될 수 없다. 여기서 예외로 생각되어지는 존케이지의 <4’33”>도 예외라고 볼 수 없다. 이는 바디우에 따르자면 음악의 무력함을 직면함으로서 그 세계를 넓힌 것이다. 그러나 무음 또한 음의 대립항으로 음악이라는 세계의 범위를 완전히 뛰어넘지는 못한다. 무음이 음으로서 존재하고, 음은 음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진리의 독특함에서 시의 자리가 아닌 다른 진리와 차별되는 시 고유의 독특함을 찾고 싶었다. 이를 바디우의 텍스트에서 찾자면 비시간성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시는 감각적인 것의 시간 속에서의 사라짐을 비시간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
어떤 사건을 명명하는 모든 일은, 사라지려는 것을 붙잡아 놓음을 통해 사건의 현전을 명명하는 모든 행위는 그 본질상 시적임을 철학은 인정할 것이다.
모든 시는 언어에 어떤 힘을 불러온다. 이 힘은 나타난 것의 사라짐을 영원히 고정시키는 힘, 또는 나타난 것의 사라짐을 시적으로 억제함으로써 이념으로서의 현전 자체를 생산하는 힘이다. 하지만 이 언어의 힘은 바로 시가 명명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시가 명명할 수 없으므로 독특한 지점은 유한성'이 아닐까?
시는 사라짐을 억제하기 때문에 스스로 사라질 수 없다. 그리고 명명함으로써 영원하기에 시간적일 수 없다. 시간성을 시화하면 필연적으로 비시간화된다. 이 영원히 사라질 수 없음, 현전할 수 밖에 없음이 시의 독특함(존재적 특징) 아닐지 생각해본다.
바디우의 '시 읽는 법'을 끝으로 글을 마친다. 이 문장을 볼 때마다 당장이라도 시집을 집어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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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은 간단하다. 시 안으로 뛰어들 것.
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사유하기 위해서 시 안에 뛰어들 것.
시는 하나의 작용인 까닭에, 하나의 사건이기도 하다.
시는 [사건이 일어나듯] 일어난다.
그 표면의 수수께끼는 이 일어남을 가리키는 것이며,
언어 속에서의 어떤 일어남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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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용은 모두 한 책이다. 알랭 바디우, 비미학, 이학사, 장태순 옮김.